이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동학농민전쟁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알 수 있는 문헌자료와 천도교의 포교현황 및 운영 실태 등을 알 수 있는 교단 자료, 특히 해방이후 동학농민혁명을 선양하기 위해 조직된 기념단체 및 이들 단체에서 추진된 각종 기념사업 관련 자료들을 그 조사 대상으로 하였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축척 5만분의 1 지형도 이전의 것으로 국토의 변화를 개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현황표로 분류된 1953년의 『管內狀況』 또한 論山敎育區의 관내 상황을 기록하고 있어서 앞의 자료와 연관하여 다룰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광주오피 『新式儒胥必知』는 조선시대 공문서식 예문을 類纂해 놓은 것인데, 종전의 이두 대신 한글로 바꾼 문식도 포함되어 있고, 조선 13도의 등급이 있어서 시대의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다. 파평윤씨는 노성현 최고의 세거사족이었고, 조선시대 지리지와 읍지의 노성현 인물조에는 파평윤씨 문중의 인물이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다. 가장 길게 기재해 놓은 것은 1910년 망국의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순절한 인사들을 ‘合倂後立節人’이라는 제목으로 모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집안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간찰이다. 예를 들어 1906년 田淵友彦이 한국이 일본의 부속국이라는 전제 하에서 작성된 『韓國新地理』가 있는 반면, 1907년 張志淵이 간행한 『大韓新地誌』는 다산 정약용의 『疆域考』를 증보하여 愛國士가 읽기를 권하고 있다. 647)는 윤시영이 고향인 예산에서 서울로부터 홍주군수로 제수되었다는 전갈을 받은 1906년 5월 14일부터 체직되어 홍주를 떠나는 6월25일까지의 43일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쓴 일기이다. 정부에서는 홍주성이 의병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게되자 이미 5월 11일 홍주군수로 제수한 윤시영을 5월 25일 홍주남포등지선유사로 내려 보내기로 하였다. 아마도 그해 7월 말쯤 귀경하였던 것 같으며, 그 동안에 안핵한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8월 3일자로 書奏하였다. 윤시영은 문과에 급제한 후 중앙에서는 承政院, 承文院 弘文館, 秘書院, 中樞院 등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兩湖宣撫使從事官, 扶安縣監, 咸興按覈使, 洪州郡守 洪州監浦等地宣諭使 등을 역임하였다.
성책 고문서로는 辛任日記(25책), 관상완점(7책), 艮谷遺稿(3책), 강도사, 강양기사(2책), 동국문헌(2책) 簡牘帖(1책), 臨之(1책), 殿策(1책), 月沙先生辨誣奏(1책), 海虹書蹟(1책), 一言單(1책), 地理新法(1책), 要覽(1책), 五倫歌(1책), 日記(1책), 庚寅日記(1책), 地圖(1책)가 있으며, 제목 없는 성책 고문서도 2종이 있다. 1917년 『家庭簡牘綴』은 公州公立農業學校 학생 김문현이 가정에 올린 편지를 모아 기록해 놓은 필본 편지 모음으로, 당시 留學生活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상의 자료들은 함흥민요의 원인을 밝히는데 뿐만 아니라 안핵사의 임무수행과정, 함흥지방의 정치ㆍ사회ㆍ경제적인 상황, 민심의 동향 등을 파악하는데 기초자료로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자료들은 내포지역에서의 동학 전파와 1894년 동학농민전쟁 그리고 천도교로 이어지는 종교 및 사회운동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동안ㆍ향안류가 서원에 보관되었던 것은 용산서원과 이를 주도하는 최씨가문이 이조리, 남면, 나아가 경주부에 걸친 조직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서원에 보관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구나 이들 자료를 통하여 영남학파의 정통을 잇는 학문적 연계뿐만 아니라, 영남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학문적 명성을 드높이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추가 온라인 저장소와 파일을 실시간으로 공동 작업할 수 있는 클라우드 연결 기능도 제공됩니다. ‘曉現彗星夕現于西’, ‘暑針九十八度’ 등 천문 기상이변과 같은 기록도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한 관심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간찰을 전체적으로 분석을 하고, 또 이들과 교류가 많았던 집안의 간찰들과 함께 비교, 분석하면 여러 가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성적표는 1942년 이후 1964년까지의 총 10점으로, 평가방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예산군에서 멀지는 않지만 지금 이 자료가 서산시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윤시영의 아들 尹玟用이 서산군청에 근무를 하게 되자 거주지를 서산으로 옮기면서 이 자료도 함께 서산으로 옮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자료군은 화전정리사업 중 충북 단양군의 경우를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한 것이다. 보관상태가 좋지 못해 해제의 어려움이 있으나 앞으로 전문적인 학자의 연구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중 전창규 소장 새마을 운동 관련 자료가 주목할 만하다.